세계와 지구 : 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예술
'세계'는 나의 경험 혹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의 맥락이 된다. 현상학은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 그러자 이러한 질문이 뒤따른다 : 나 자신의 무와 직면하게 되었을 땐 경험하는 두려움 이외에 세계가 그 자신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경험이 되겠는가?
하이데거의 후기 저술에서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방식을 논의하기 위해 예술작품의 경험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예술작품의 경험에 대해 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는 현존재의 비토 대적 특성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하게 된다. 토대의 결여는 내가 나의 유한성을 완전하게 이해한 무서운 자유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이다. 일정한 시간 동안 하이데거는 진정한 실존의 가능성을 독일 나치 운동에 내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독일 나치즘은 독일 민족 속에 잠들어 있는 위대함의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는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떄문이다.
나치즘에 대한 그의 경험 이후에 그는 예술을 존재의 토대와 만나는 것으로 바라보기 위해 시작하였다.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항상 역사공동체의 세계를 표명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예술작품은 이 세계의 진실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예술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고의 전환은 전통적인 미학의 체계에서 크게 벗어났다. 칸트 철학에 뿌리를 둔 현대 미학자들은 미학을 주관적인 환상, 곧 조화를 만들어 내는 마음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칸트에게 있어 진리란 미적 경험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세계를 객관적인 실체와 주관적인 외형으로 분리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간주하여 사고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 같은 체계 안에서의 예술작품은 기껏해야 진리에 대한 상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는 자연과 마음이 결코 합하여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진실에 대한 다른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에게 진실은 사건들의 객관적인 상태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의 일치가 아니다. 감추어지고 또는 모호한 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밝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객관적 현실은 오히려 내가 나의 본디 고유한 가능성을 상실함에 따라 나타나는 '세상 사람들'의 비본래적인 세계이다. 이와 같은 '무아경의' 경험은 나의 죽음에 대한 무시무시한 기대로 이해되었고, 자신의 유한성에 직면하여 일상적 생활세계의 무의미함의 경험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예술작품의 기원"에서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의 경험을 열어 주었을 때 생겨난 이탈 감인 또 다른 유형의 '황홀감'이 제시된다고 하였다. 예술작품을 마주할 때 내가 마치 처음으로 그 세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곧 나는 그 작품을 있는 그대로 진실한 모습의 견지에서 보게 된다. 이 같은 진실에 비추어 보면 나 자신은 다르게 보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가능성이 내 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그 예술작품은 나에게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진리는 오직 작품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세계, 내가 타자와 함께 거주하는 세계 안에서만 발생한다.
예술작품은 세계에 대한 진리를 표명함으로써 이 세계를 구성한다. 과거의 예술작품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를 통해 우리는 예술이 삶에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고, 이런 가능성이 다시 한번 실현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진정한 예술작품이라 할지라도 예술작품은 그 작품의 의미를 한 번에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저항하는 것으로 우리는 예술작품의 물질적 측면을 마주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진정한 예술작품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예술작품의 토대인 '대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대지의 측면으로 예술작품은 완전하게 이해될 수는 없지만 예술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세계가 자기 완결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완전히 지배될 수 없는 비 객관적인 토대라는 것을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지를 중요한 의미가 출현하는 어떤 것으로 모든 의미의 출처와 기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이해로 나아간다. 죽음을 예상하는 현존재가 실존을 위한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요구로부터 벗어날 때 새로운 의미의 선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에 기초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간이 의미로 충만한 세계 내 대지에 거주하는 것을 학습할 수 있다는 희망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신비를 인정함으로써 예술작품 속에서 구현되는 존재의 비 객관적인 토대에 기초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의 틀에서의 예술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저 예술이 '보여 주기'와 '드러내기'의 한 양식으로만 이해된다면 현상학에서 예술의 중심적인 역할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그 자체를 그저 드러내 보이는 것의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후기 저술에 나타난 바에 의해서 현존재는 기본적으로 예술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이 같은 만남으로 인간의 실존은 주체의 자기중심적인 오만한 행위에 의존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구성하는 행위를 통해 의미가 드러내도록 하는 능력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능력을 'poiesis'라고 부른다. 이는 그리스 어에서 영어로 '예술'을 나타내는 'art'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개념은 특별한 매체와 무엇을 만드는 행위 일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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