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적 사상가들의 주장으로 의하면, 인간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경험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줄 원리를 발견하고 하는 욕구가 있다. 이것은 경험의 혼란스러운 카오스적 변화에 저항할 수 있는 견고하고 안정적으로 실존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사실이었다. 신도, 절대자도, 자아도, 자기 자신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경험들로 인해 고유한 카오스와 다양성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들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무정형성'과 '다양성'을 전체적인 틀 속에서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대신에 상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유희가 나타나도록 돕는다면, 우리는 경험의 무상함을 지탱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떄문에 poiesis는 포스트모던 적 세계에서 매우 유용한 활동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이 세계 속에 현존하는 것으로 유한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적 사고에는 상상을 중시한다. 그리고 경험은 놀이의 장으로 간주한다. 그 놀이의 장에 절대적인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자유를 제공하게 된다. 다양성의 즐거움은 현대적 사고의 이 같은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유희가 주어짐에 포스트모던 적 poiesis가 트라우마와 현실의 공포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아우슈비츠나 테러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포가 만연한 삶에서 모든 보안을 포기하라는 충고와 상상의 자유로운 놀이를 허락하도록 '내버려두라'는 제안들은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불안감' 아닌가?
트라우마는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트라우마 이후에 나타나는 기억과 느낌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할 수 없는 어떤 특징을 동반한다. 이와 함께 매우 충격적인 상처의 사건들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생존자는 우리 문화의 원형적 인물로 제시된다. 특이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전통적인 문화의 형성 원리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적 문화에서 트라우마는 존재에 의미를 인증하고 부여한다. 초월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유일한 의미를 지닌 것은 '부정적' 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트라우마의 비유를 사용하여 고통을 다루는 우리의 현재 방식을 '비극'의 고전적 개념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 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비극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건이자 또한 그 사건의 예술적 표현이다. 그 결과 비극은 고통의 한 표현이 된다. 그러나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한 바와 같이 그 통을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정화하는 역설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 비극의 행위는 인간 지식과 힘의 한계를 그리고 그 한계가 침범당했을 때 뒤따르게 하는 고통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카타르시스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느낌을 없애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이는 정화에 관한 의례적 실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카타르시스는 우리가 목격한 공포를 견디어 내도록 허락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비극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바라볼 수 있을 때만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트라우마 치료의 목적은 그들을 망령처럼 따라다니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몰아냄으로써 희생자의 본질적인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비록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의 삶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강도와 빈도는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 치료에서는 비극 공연과 매우 유사한 측면들이 있다. 트라우마 치료의 과정에서 희생자는 그 사건이 발생했던 것처럼 회상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격려된다. 다시 만든 이야기가 트라우마의 경험을 앎과 반성적 사고의 대상이 되도록 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은 사건과 기억 사이의 바로 이 차이가 그 사건을 상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표현 예술치료에서 재회상되고 재 경험되는 그 사건들은 이미 죽은 과거를 단순히 압축해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비극 공연처럼 과거를 창조적으로 정교화하는 작업, 즉 과거의 진실을 실제로 더욱 면밀하게 다루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를 구현하는' 예술의 힘을 볼 수 있다.
트라우마를 다루는 데 있어서 치료사의 역할은 토대에 대한 포스트모던 적 비판의 견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치료사는 내담자의 충격적 경험을 목격하는 증인으로 기술된다. 이처럼 '목격하는 것'의 개념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목격하는 것은 항상 내담자의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의 진실로 이해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또한 치료사의 역할은 그와 같은 진술을 자신의 해석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목격자의 역할에서 치료사는 백지상태 또는 순수한 의식 상태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치료사 쪽에서의 다른 반응들이 나온다면 그것은 '역전이'로서 이해될 수 있고 제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일반적으로 치료사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능동적 경청' 이상의 의미로 네가 말한 것에 의해 내가 영향을 받는 것에 반응하고, 말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심지어 미적 형태를 지닐 수도 있다. 그것은 너의 이야기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이 상상력이 풍부한 정교화 작업에 수반하는 '미적 반응'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수성을 가지고 행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네가 내게 말한 것을 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미적 개입'을 함으로써, 즉 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으로써, 나는 너의 이야기를 더욱 잘 말하게 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또 그 이후에 '미적 분석'을 수행함으로 인해 네가 만들고, 행하고, 말한 모든 것들을 바라봄으로써, 그 모든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더욱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예술이 치료 공간에서 사용되기 위해 시작하면, 예술은 실제 현상의 영역에만 머무를 수 없다. 심리극과 같은 예술치료는 연기함으로써 그 사건의 의미를 변화시키나, 연출가의 의도로 진행된 필연적인 변형은 치료적 과정에서 단점이 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의 장점이다. poiesis에서 미메시스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상상하며 변화시키고 변모시키기 때문에 정화의 효과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 사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진실한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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