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esis의 개념이 어느 정도 표현예술치료의 철학에서 중심개념으로 가능할 수 있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poiesis는 표현예술치료 철학의 인간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적절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을 세계 속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poiesis는 현대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3가지 유형의 앎을 제시하였다. 관찰에 의한 앎, 행위에 의한 앎, 그리고 만들기에 의한 앎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해가 가능한 지적 행위로 '테오리아'는 가장 높은 수준의 앎으로 간주되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에 관한 앎과 참여활동을 통해 앎을 가리키는 '프락시스'는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의 앎이다. 그러나 장인과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인 앎을 나타내는 'poiesis'는 가장 낮은 수준의 지식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술과 이해 사이의 관련성은 예술 활동이 단순하게 맹목적인 영감의 활동 이상의 것을 의마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비극의 극작가로서의 지식은 극을 구성하는 기술 뿐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인간행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는 책에 분명히 저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지헤에 기초하고 있는 비극만이 고통을 겪고 있는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만약 비극이 이러한 치료효과를 지니지 않았다면, poiesis에 의해 제공되는 지식은 그 본질이 무엇이든 단순히 기술적인 노하우 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poiesis에 부여하는 가치는 이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poiesis는 앎 또는 지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poiesis는 예술가들이 영감을 위해 필요한 일종의 광기라고 표현현다. 그는 모방을 통해 창조하는 것은 진실된 것이 아닌 세상의 어떤 사물에 대해 불완전한 복사를 하는 것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플라톤에게 poiesis가 단순히 광기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되었듯이, 시인들의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작품 또한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혼란을 유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시인은 독자들의 영혼을 선동한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시민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평온한 마음을 빼앗아간다. 플라톤은 이를 정의로운 사회로부터 추방하여야 한다고 표현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라톤의 텍스트는 중요한 논점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은유나 비유와 같은 시적인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신화 또는 스토리텔링과 매우 다르게 보이는 로고스 또는 철학적 이성도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신화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플라톤은 시의 중심적 양식인 '미메시스'를 거부하고 있을지라도, 미메시스를 기본적인 문화양식으로 이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의존하고 있다. 플라톤은 자기 자신을 poiesis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시적인 철학자였다.
poiesis의 개념이 어느 정도 표현예술 치료의 철학에서 중심 개념으로 가능할 수 있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poiesis는 표현예술 치료 철학의 인간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적절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을 세계 속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poiesis는 현대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3가지 유형의 앎을 제시하였다. 관찰에 의한 앎, 행위에 의한 앎, 그리고 만들기에 의한 앎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해가 가능한 지적 행위가 가장 높은 수준의 앎으로 간주하였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에 관한 앎과 참여 활동을 통해 앎이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의 앎이다. 그러나 장인과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인 앎을 나타내는 'poiesis'는 가장 낮은 수준의 지식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술과 이해 사이의 관련성은 예술 활동이 단순하게 맹목적인 영감의 활동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비극의 극작가로서의 지식은 극을 구성하는 기술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인간 행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는 책에 분명히 저술되어 있다. 이처럼 지혜에 기초하고 있는 비극만이 고통을 겪고 있는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정화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만약 비극이 이러한 치료 효과를 지니지 않았다면, poiesis에 의해 제공되는 지식은 그 본질이 무엇이든 단순히 기술적인 노하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poiesis에 부여하는 가치는 이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poiesis는 앎 또는 지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poiesis는 예술가들이 영감을 위해 필요한 일종의 광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모방을 통해 창조하는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닌 세상의 어떤 사물에 대해 불완전한 복사를 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플라톤에게 poiesis가 단순히 광기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되었듯이, 시인들의 활동 결과로 나타나는 작품 또한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혼란을 유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시인은 독자들의 영혼을 선동한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시민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평온한 마음을 빼앗아 간다. 플라톤은 이를 정의로운 사회로부터 추방하여야 한다고 표현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라톤의 텍스트는 중요한 논점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은유나 비유와 같은 시적인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신화 또는 스토리텔링과 매우 다르게 보이는 로고스 또는 철학적 이성도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신화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비록 플라톤은 시의 중심적 양식인 '미메시스'를 거부하고 있을지라도, 미메시스를 기본적인 문화양식으로 이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존하고 있다.
니체는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고를 전개하였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비극적 poiesis의 부활을 준비하는 방법을 찾기를 기대하였다. 니체의 철학적 비평은 그 자체가 시적인 용어로 서술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고를 펼칠 때 논증이 아닌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니체에게는 당시 유럽의 문화가 과도한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빠져 삶에서 문화의 열정적 토대가 사라진 것이다.
니체는 고전주의적 언어학자로 훈련받았다. 그의 지식은 적어도 그 당시의 여느 학자 못지않은 수준이다.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사고의 경향과는 급격하게 다른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니체의 눈에는 poiesis가 존재의 불합리한 특성에 대한 통찰로부터 그리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약물이었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존재의 카오스적 추구가 결과적으로는 존재의 유한성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는 비극이 단순히 문학적 텍스트로는 다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비극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일지라 해도 비극을 텍스트로 다루기보다 공연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다면, 비극의 특징 중의 하나인 합창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극의 공연을 상상적 기억의 하나로 감상하는 것은 극에서 합창에 의해 느껴지는 '낯선 탁월함'을 이해하도록 돕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비극적 예술인 poiesis는 무미건조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화에 대한 대안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기원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을 수 있고, 비극의 부활이 일어나는 방식을 준비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처럼 니체가 펼친 poiesis의 디오니소스적 개념은 표현예술 치료의 이론을 위한 기초가 된다.
그러나 니체의 poiesis의 개념은 형이상학을 아우르지 못한다. 여기에서 대안적인 관점으로 하이데거의 poiesis개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존재는 사고보다 앞선다는 것을 주장함으로 서양문명의 과도한 합리주의적인 특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하이데거는 철학 자체에 깔린 철학적인 기본자세를 재확인하는 방법으로 존재가 사고보다 앞선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poiesis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해는 시간으로서 존재의 특성을 드러내어 보이는 기억하기와 관련이 있다. 이는 고집스러운 자기주장이 아닌, '그대로 두는 것'이다. '사건'은 현재 존재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사건은 기억된 것이 다가오는 미래 속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개별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poiesis는 존재가 사건으로 생겨나는 행위이다. 진리를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내어 역사적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이란 전통적인 철학에서 추구해 온 것처럼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은 항상 특별한 역사 세계 속에 위치한다. 작품은 객관적 지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신비를 포함한다. 그것은 해석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준다. 그런데도 작품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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