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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예술 치료학

표현예술 치료의 철학 :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poiesis-3

by yourjinny0201 202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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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실존 : 세계내존재


 의식의 현상학에 기초하여 전제 없는 철학을 하기 위한 후설의 시도는 경험을 모든 차원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철학적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과학적인 인식의 현상과 함께 거의 모든 경험의 다양한 영역들도, 도덕적이고 심미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을 모두 포함하여 현상학적인 탐구의 합법적인 영역이 되었다. 

 마틴 하이데거는 특히 의식과 의식 대상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를 좋아하여 괄호로 묶은 후에 한 번 더 실존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하이데거의 의견에 의하면 의식에게 기초하여 논의를 시작하려는 것은 비록 이원론적인 결론을 거부하게 될지라도 그 자체로 데카르트의 철학적 체계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의식은 일상적인 경험의 주어짐으로부터 철학적으로 추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는 인식의 반성하는 행위의 결과이다. 그러나 실존은 반성에 앞선다. 결과적으로 의식은 인식적인 행위의 출발점으로는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상학이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의식의 대상을 지향적인 행위 속으로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위험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결국 존재론적으로 세계의 실존에 앞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주관성을 가정하는 선험적 관념론으로 통하는 주관성의 철학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세계는 선험적인 주체의 행위의 결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따르면 모든 전제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현상학은 스스로 정당화할 수 없는 관념론의 형이상학으로 후설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후설의 사고에는 하이데거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킨 또 다른 사고의 경향이 존재했다. 후설은 일상적 경험의 장소를 '생활세계'라고 불렀으며, 과학적인 탐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와 같은 다른 모든 세계의 기초로 간주하였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생활세계, 즉 일상적인 삶의 세계는 우리 실존의 행위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세계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 존재하여 존재가 된 우리는 '거기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실존은 오롯이 거기에 있음의 개념을 통해 이해된다. 이것은 인간은 세계내존재라는 것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실존적 특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는 의식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우리의 인식적인 앎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그야말로 그 세계 속으로 '던져진' 존재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특별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 만약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개인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주체의 의미 부여 행위를 통해 '세계'가 생겨난다는 선험적인 관념론의 입장을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이다.


 나는 나의 실제적 실존을 통해 내가 만들지 않은 세계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 세계는 그 속에서 나 자기 삶의 계획을 구성해야 하는 의미체계로서 나에게 주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나는 세계 속에서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 속에서 타인과 함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존재는 타인과 함께 있는 존재이다. 나와 함께 거기에 있는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는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세계 속에 있는 나에 대한 존재의 기본적인 현상이 나에게 의미 없는 사실은 아니다. 타인과 함께하는 삶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주어진다. 또한 그 세계의 의미구조는 오로지 내 실존의 가능성의 견지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다. 나는 내가 다른 세계 속에 던져지도록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선택할 수 있다. 특별히 내 존재에 대해 책임감 있는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하거나, 또는 책임을 거부하고 하이데거가 '그들' 또는 '세상 사람들'이라고 부른 그 사회의 익명에 의한 대중 속에서 군중의 일부가 되어 자신을 잃어버리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들'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 나 자신의 존재 기준이 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인간이랑 존재하는 한 나 자신의 고유한 모습이 되도록 선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항상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실존은 존재하는 개인으로 나에게 고유한 실존을 선택함으로써 나타난다.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나의 실존에 가장 고유한 것, 나에게 고유하게 속하여 있는 것은 나 자기 죽음으로 설명된다. 누구도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나의 삶에 고유한 삶을 선택한다면 나 죽음의 절대적 확실성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로서 현존재는 불안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이 불안은 어떠한 특별한 대상에 대한 불안이 아닌, 대상이 없는 막연한 불안이다. 이처럼 마음의 불안정한 상태인 '불안'은 세계내존재의 안전을 위협받게 된다. 죽음은 나 자신의 개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고, 나 자신의 실존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를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 오로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나는 진정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 진정한 방식으로 함께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그들의 삶에 뛰어들어 그들 자신의 실존을 위한 책임감을 덜어 줄 수 없다. 기껏해야 고유하지 않은 삶의 위험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자 노력하는 것과 자유를 위한 길을 터 주도록 노력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배려'라고 부른, 타인을 위한 진정한 돌봄은 개인이 그 자신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도록 돕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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